은퇴 후 누리는 가장 큰 사치는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 여유를 빌려 아내와 함께 마트 쇼핑을 했습니다. 혼자라면 숙제처럼 해치웠을 장보기도, 아내와 함께하니 즐거운 데이트가 됩니다.

장면1: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마주한 풍경
매장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저희 앞에는 어린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부가 서 있었습니다. 아이 손을 꼭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니, 저희 부부의 치열했던 젊은 날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이제는 굳이 앞서갈 이유도 없어, 자연스레 아내 보폭에 맞춰 걷게 됩니다. 그게 요즘 제일 편합니다.

장면2: 오늘의 목적지, 마트 입구
드디어 도착한 매장 입구. 평일 낮 시간의 한적함이 주는 평화로움이 좋습니다. 카트를 하나 밀고 아내와 보폭을 맞추며 들어서는 길, 오늘 저녁 반찬은 뭘로 할지, 별것 아닌 생각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장면3: 수채화처럼 물드는 쇼핑의 즐거움
화장품 코너를 꼼꼼히 살피는 아내 모습부터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고르는 진지한 손길까지. 마트 풍경이 특별할 건 없는데, 은퇴를 요즘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합니다. ‘이게 더 싱싱해 보인다’며 말을 건네는 아내 목소리가 오늘따라 참 정겹습니다. 어느 걸 고를지 한참 고민하다 집어 든 과일 상자를 보며 서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장면4: 새로운 세상, 무인 계산대와의 만남
장보기를 마치고 향한 곳은 ‘스피드 계산대’라 불리는 무인 정산 구역입니다. 처음에는 기계 앞에 서는 것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이제는 아내와 손발을 맞춰 바코드를 찍는 과정도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껴집니다. 변화하는 세상을 천천히, 그리고 함께 배워가는 것 또한 은퇴 생활의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장면5: 쇼핑 끝에 만난 달콤한 보상, 떡볶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마트 구경도 예외는 아닙니다. 쇼핑을 마치고 출출해진 배를 채우려 들른 분식 코너. 따끈한 국물의 어묵과 매콤달콤한 떡볶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아내와 소박하게 나누는 이 간식 시간이 세상 그 어떤 성찬보다 달콤합니다.
♥ 1001가지 즐거움 중 1001-6번째를 마치며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좋습니다. 아내와 카트를 밀며 나누는 소소한 대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껴지는 묵직한 장바구니의 무게. 집에 돌아와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나서야, 오늘 하루가 꽤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